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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립 고등학교 교환학생, 그 후 10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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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한 달, 일 년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진 않았던 것 같은데, 똑같은 일을 하며 비슷한 하루하루를 살아서인지 아니면 진짜 나이가 들어서인지 얼마 전 제가 대학교를 졸업한 지도 4년이 훨씬 지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미국 공립 고등학교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니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고 한국에 귀국했던 여름이 자그마치 10년 전이더라고요.
 
교환학생을 떠났던 한국 나이 17살 당시, 7살 때 길거리에서 태극기를 두르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응원 했던 걸 떠올려보면 생각도 잘 안 날 만큼 까마득한 오래전 과거의 일 같았다고 생각했었는데, 28살이 된 지금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갔던 18살의 여름이 재작년 여름처럼 느껴지는 건 왜죠?
 
가끔씩 제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교환학생 후 진로나 계획, 혹은 공립 고등학교 교환학생에서 어떻게 한국 검정고시를 보고 미국 간호사가 되었는지에 대해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분들을 위해 미국 공립 고등학교 교환학생을 가게 된 계기부터 교환학생 후 저의 10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얘기해 보려고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원과 독서실을 다니느라 바쁘던 중학교 3학년 겨울, 독서실이었는지 학원었는지 공부를 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온 저에게 엄마는 뜬금없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 캐나다나 미국으로 유학 갈래? 오래는 말고 딱 1년만."
 

어렸을 때부터 공공장소나 대중교통에서 외국인을 보면 영어로 말 걸어보는 걸 좋아했고 외국에 나가 생활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집안 사정상 유학을 보내 줄 형편이 안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유학 얘기는 커녕, 유학에 대한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엄마가 어디서 무슨 얘기를 오셔서 유학에 대해 별생각 없이 물어보시나 보다 생각하고 저도 별생각 없이 "응, 나 유학 갈래. 미국은 사건사고가 많아 좀 무서우니까 캐나다로."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나네요.
 
제 대답을 들으신 엄마는 컴퓨터로 이것저것 검색하시더니 "미국에 공립 고등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라고 일 년 동안 미국인 자원봉사자 가정에 무료로 살면서 학비가 무료인 공립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제도가 있대. 캐나다 말고 미국으로 가." 라고 하시길래 저도 알았다고 했었지요.
 
후에 엄마께 들은 바로는 사촌오빠들과 언니가 외국생활을 오래 하다 한국에 왔는데, 외국 생활을 하고 한국에 오니 성격도 밝아지고 독립적인 사람이 되었다며 저와 동생도 언젠가 한 번쯤은 외국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중학교 졸업도 아직 안 한 평범함 만 14살이었던 저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그때부터 머릿속으로 미국 학교 첫날 미국 아이들에게 저를 소개하는 상상, 영화에서만 보던 노란색 스쿨버스를 타고 등하교하는 상상, 대부분 선생님의 강의로만 이루어진 꽉 막힌 한국의 지루한 수업 말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발표하는 미국 학교의 수업을 상상하며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아빠는 생전 계획에 없던 유학 얘기는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냐며 "뭘 믿고 애 혼자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에 보내냐.", "나는 모르는 사람한테 우리 애 못 맡긴다.", "미국에서 1년 살다 오면 다시 돌아와서 한국 학교에 적응은 어떻게 할꺼냐.", "위험해서 안 된다.", "나는 애랑 떨어져서 못 산다."등 완강히 반대하셨지요.
 
교환학생을 가겠다고 하고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미국 땅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중학교 3학년이던 겨울밤, 엄마가 가볍게 툭 던진 제안을 덥석 물어버린 저는 아빠의 반대에도 불고하고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끝낸 2012년 9월, 미시간주의 Standish 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에 교환학생을 가게 됩니다.
 

미국 학교 첫날 수업이 끝나고
 

다행히도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든 작은 마을의 전교생 600여 명 남짓한 작은 학교여서 학교 첫날부터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고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 평생 잊을 수 없을 즐거운 추억들을 많이 쌓았지만, 미국 생활 초반엔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 저를 돌봐주셨던 호스트맘께서 학교에 몇 번 가셔야 했던 일도 있었어요.

미국 학교 첫날 레베카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아서 토요일이었던 그다음 날 레베카의 생일파티에 다녀왔어요.
오른쪽에 체크무늬 잠바를 입고 있는 사람이 저예요!
추운 미시간의 날씨가 익숙하지 않았어서 친구 집에 있던 잠바를 빌려 입었답니다.
이 날 처음으로 타코도 먹어보고 스모어도 먹어봤어요.
 

한국과는 너무도 다른 문화 때문에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고, 미국인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거나 내가 미국인들의 말을 못 알아들어 답답할 때도 너무 많았고, 대부분 백인으로 이루어진 미국 학교에서 미국 아이들과는 다른 생김새에 주눅이 들 때도 있었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고 넘어져도 훌훌 털고 바로 일어나는 성격 덕분에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학기 초에 있었던 홈커밍위크

 
특히 부모님께서 무리하셔서 절 미국에 보내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과 거의 연락도 안 했고, 한국 TV도 안 봤고, 미국에 있는 10개월 동안 무조건 뽕을 뽑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영어에만 둘러싸여 살았어요. 
 
여느 대한민국의 학생들처럼 공부에만 열중하느라 꿈도 없었고,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몰랐던 저에게 어느 날 인생이 바뀌는 일이 일어나지요.
 
눈이 항상 수북이 쌓여 있는 추운 미시간의 겨울 날씨 때문에 심한 감기에 걸렸던 저를 호스트맘께서 Urgent Care (응급상황은 아니지만 당장 의사를 봐야 할 경우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진료소)에 데려가셨습니다.
 
처음 가본 미국 병원인 데다가 그 당시 영어도 잘 못했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는데, 손짓 발짓 등 온몸을 이용해서 저와 소통하려고 노력하시고 불안해하던 저를 안심시켜 주시며 정말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간호사선생님과 의사 선생님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었어요.
 
이때 저는 "나도 미국 간호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을 돌봐주고 싶다. 특히 영어에 서툰 환자들을 내가 잘 돌봐줄 수 있을 거야. 내가 그 상황을 겪어봤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미국 간호사의 꿈을 키우게 됩니다.
 
(미국 병원 시스템을 잘 아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간호사라고 생각했던 분은 사실 간호사가 아닌 우리나라 간호조무사 급의 Medical assistant 가 아니었을까 해요.)
 

제가 정말 좋아했던 합창수업의 합창 공연날
한국에 돌아오기 1-2주 전이었던 학년 말 마지막 공연에서 다 같이 아리랑을 불렀었어요!

 
교환학생의 경우 유학비자 F-1이 아닌 일 년짜리 J-1 비자로 미국에 오게 되는데, 공립 고등학교에서 한 학년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나고 미국에서 더 공부를 하려면 정식 유학비자인 F-1 비자를 받아 사립학교로 전학을 가야 합니다. 
 
F-1 비자로는 공립학교를 다닐 수 없거든요.
 
미국 간호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정말 간절히 미국에 남고 싶었지만 미국에 오기 전부터 사립학교는 정말 금액이 어마어마해서 못 간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기에 딱 1년만 미국에 있다가 한국 고등학교로 복학하기로 부모님과 약속하고 미국에 왔던 것이기 때문에 저는 결국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끝난 2013년 6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가게 돼요.
 
미국 생활을 정리하며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고도 미국 간호대를 진학하는 방법, 한국 간호대를 졸업하고 미국 간호사 면허를 받아 미국으로 이민하는 방법, 저렴하게 미국 대학교를 다닐 수 있는 방법, 한국에서 고졸 검정고시를 보고 미국 대학교에 진학하는 방법 등을 혼자 알아봤었어요. 
 
그러고는 한국에서 고졸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우리나라 전문대급인 미국의 Community College를 진학하는 게 가장 빨리 미국 간호사가 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미국생활 막바지 호스트맘과 ALDI 라는 식료품 점에 장을 보러 갔던 어느 날 대형 냉장고 유리창에 비춰진 제 모습을 보고미국에 계속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나는 미래의 미국 간호사다. 친척도 친구도 하나 없이 말도 안 통하던 미국땅에서 살아남았는데 앞으로 내가 못 할 일이 뭐가있어."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미국을 떠나며 정든 선생님들, 친구들 그리고 호스트맘과 헤어지는 것, 그리고 미국에 남을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 슬펐는데, "비록 내 상황이 미국에 남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꼭 다시 이 미국땅에 돌아올 거야. 꼭 미국에 다시 돌아와서 간호사가 되어야지. 간호사가 되면 특히 나처럼 영어가 부족한 환자들을 온 마음을 다해 돌봐줄거야." 라고 결심을 했었어요.
 
뭐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제 성격상 미국 간호사의 꿈은 한국에 돌아가서도 절대 놓을 수 없었는데요,  제 부모님 조차도 너무나 어려운 헛된 꿈이라고, 네가 미국에 잠깐 살다와서 좋은 것만 보이는 거라고, 다시 한국 고등학교에 복학해서 한국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해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좋은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남들의 "안될거야.", "미국에서 고작 10개월 살다와서는 힘들지.", "한국 검정고시를 보고 미국 대학교 수업 못 따라가.", "미국 유학이 얼마나 비싼데." 라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는 한국에서 검정고시를 보고 만 22살에 미국 조지아주의 주립대에서 간호학사 학위를 받은 미국 간호사가 됩니다.
 
졸업 두 달 전에 조지아주 소도시의 병원에 취직도 해서 영주권 스폰도 약속받았었고요.
 
4년간 미국 주립대에서 유학을 하며 학비, 책값, 기숙사비, 생활비 등 모든 금액을 포함해 한국돈으로 1억이 좀 안 되는 돈이 들었는데, 다음 편에서는 미국 공립 고등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 후 어떻게 다시 미국 유학을 준비했는지, 어떻게 저렴한 금액으로 미국 대학교를 졸업했는지, 미국 대학 생활과 간호 본과 입학은 어땠는지, 그리고 미국 간호사로서 취업 영주권 받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 동생의 경우 미국 공립 고등학교 교환학생 후 유급없이 한국 고등학교로 복학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고,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공무원이 되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제 동생의 이야기도 해 보려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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